입도조 강영감사공(康永監司公)은 득성조(得姓祖) 관정대훈 공신 교화성사(敎化聖師) 강후(康侯)공의 88세손이요, 시조(始祖) 성골장군(聖骨將軍) 국조대왕(國祖大王) 강호경(康虎景) 공의 21세 손이다. 한편 이태조(李太祖)의 현비(顯妣)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의 사촌 오빠이며, 자헌대부행전라도감사(資憲大夫全羅道監司) 재임 중(在任 中) 조정은 왕위계승(王位繼承) 문제로 신덕고황후 소생(所生)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이 피화(被禍)를 당하자 근친인 강영(康永)은 위해(危害)를 모면하기 위하여 1402년(壬午) 맏아들 귀존(貴尊)을 비롯한 가속(家屬)을 충청도 보령에 남겨 두고 제주도로 피신(避身)하였다. 현해타를 건너 함덕포로 입도(入島)하여 정부인 제주고씨(貞夫人 濟州高氏)를 배필로 맞이하여 정(禎), 복(福), 만(萬)의 세 아들을 낳고 향인(鄕人)들에게 충효(忠孝)의 정신과 예의범절을 가르치니 그가 미친 학문적 영향과 사상은 이 땅에 파급 되는 바 적지 않았다.
고려사에 보면 강영(康永)은 고려 공민왕 10년 1362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한 경성(개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에 서훈되었고 1363년 11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적을 격주(擊走)한 공으로 기해홍적격주이등공신(己亥紅敵擊走二等功臣)으로 서훈되었다. 1373년 강계만호(江界萬戶)로 역임하였고 「우왕(禑王) 2년 1376년(병진)에는 원수로서 논산(옛지명:연산) 침범한 왜구를 최영, 최공철, 박수연 등과 더불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홍산(鴻山)에서 싸워 적을 대패시켰다. 1377년 왜구가 강화에 침입하자 나세府事와 조사민 이원계 등과 더불어 격퇴시켰으며, 이어 왜구가 염광, 장사, 해주, 평주 등에 침입하자 元帥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격추시켰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1377년 丁巳에는 신천강씨 평양파 종인(宗人) 한학자 강여헌(康濾憲) 계암당(桂菴堂)이 지필한 「신천강씨보(信川康氏譜) 유명조선국 신천강씨정승명현록(有明朝鮮國信川康氏政丞名賢錄)」16~17쪽에 보면 강윤휘(康允暉)님의 맏아들 강영(康永)은 과갑 한림학사(科甲 翰林學士)와 경기도(京畿道), 평안도(平安道), 경상도(慶尙道), 함경도(咸鏡道), 사도감사(四道監司)를 역임했다는 내용이 명기된 것으로 보아 전라도(全羅道) 감사까지 포함하면 五道監司를 역임하였다.
강영 감사가 낙향할 무렵 고려의 유신(儒臣)으로 충절이 귀감이 된 김만희(金萬希) 공과 이미(李美) 공과 한천(韓蕆) 공과 더불어 제주에 입향한 四大賢人으로 일컫고 있다.
신천강씨 입도조 강영감사공의 묘소는1413년 태종14년 癸巳년에 서거한 후 516년이 되는 1937년 음력 3월3일 조천읍 조천리 119번지 방묘(方墓)에서 기건 목사(奇虔 牧使)가 서술한 지석(誌石)이 발현(發見)되었다.
제주목사 청파(靑坡) 기건(奇虔) 공이 쓴 지석에는 「신천강영감사(信川康永監司)의 행적과 위업이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어, 후손들은 정성을 모아 수묘(修墓)하고 조천서원상도사(朝天書院尙道祠)를 지어 득성조(得姓祖)와 시조(始祖)와 중시조(中始祖)와 정숙공(靖肅公)과 입도조(入島祖)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5일 제향(祭享)을 드리고 監司公墓祭도 奉行하고 있다. 이와 같이 祖上님을 경배하고 追慕하며 愛族團結에 일로 매진하는 것은 천장지구(天長地久)할 것이다.
<자료2>
信川康氏 始祖 및 本貫의 淵源
신천강씨(信川康氏)의 원조(元祖)는 교화성사 강후(康侯) 공이다. 그의 아버지는 주나라 무왕(武王)의 첫째 아우이며 휘(諱)는 봉(封)이요, 시호(諡號)는 강숙(康叔)이요 작위(爵位)는 강숙위군 제후(康叔衛君諸侯)이다. 그의 둘째 아들 후(侯)는 단기 1212년(기원전1121년) 기자(箕子)와 함께 평양에 들어와 금법팔조(禁法八條)를 제정하여 국정(國政)을 협찬(協贊)하고 국교(國敎)를 선양한 공로로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책록(策祿)되었고 백성들은 이 분을 교화성사(敎化聖師)라 일컬었으며 기자는 그의 아버님 시호 강숙(康叔)의 강자(康字)를 후(侯)에게 사성(賜姓)하므로써 신천강씨의 得姓祖가 되었다.
元祖 강후(康侯) 공의 68세손 강호경(康虎景)은 신라 말엽 호(號)는 세인들이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일컬었으며, 백두산으로부터 전국 각처를 유람하시다가 송도(松都) 부소산(扶蘇山) 마루 아래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강충(康忠)이요, 강충의 아들이 강보육(康寶育)인데 그는 왕건 태조의 외고조부가 되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후 성골장군 강호경(康虎景) 공을 국조대왕(國祖大王)으로, 외고조부 강보육(康寶育) 공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그러므로 신천강씨(信川康氏) 시조(始祖)는 성골장군 ․ 국조대왕 강호경(康虎景) 공을 始祖로 모시고 있다.
시조(始祖)의 14세손 충열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은 고종때 몽고 침입시(蒙古侵入時)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책록(策祿)되었고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성(信城)은 신천(信川)의 옛 지명이다. 이때부터 본관을 신천(信川)으로 삼게 되었으며 이분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황해도 신천군 북부면 산죽리 광복동 정남향으로 모셨지만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관계로 묘소(墓所)에 참배(參拜)할 수 없으므로 1973년 10월 관악산 기슭에 단조(壇兆)를 조성(造成)하고 고려문하시중신성부원군휘지연공신단(高麗門下侍中信城府院君諱之淵公神壇)을 마련하고 매년 10월3일 세향(歲享)을 드리고 있다.
중시조의 五代孫 상산백(象山伯) 강서(康庶)를 中祖로 하고 곡산(谷山)이란 별관을 일부 후손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강서(康庶)의 손자 득룡(得龍 ․ 諡號 :安靖)은 李太祖王妃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의 큰 오빠이다. 고려말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건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大義)를 굽히지 않고 관악산에 들어가 연주암(戀主庵)에 살면서 매일 같이 연주대(戀主臺)에 올라가 송도(開城)를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이성계(李成桂)大王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안정(安靖)이란 시호를 내리고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했으며 그 후손 일부는 별관(別貫)을 안릉(安陵) 또는 재령(載寧)이라 쓰고 있는 가문도 있다.
상기의 내용을 고찰해 보면 본관(本貫)은 신천(信川)으로 정하여졌으나 信川으로부터 분관(分貫)되어 별관(別貫)으로 곡산(谷山) ․ 재령(載寧) ․ 안릉(安陵) ․ 충주(忠州) ․ 진주(晋州) 등이 있으나 信川康氏大宗會에서는 2007년「信川康氏大同譜」를 거국적으로 발간하여 始祖 國祖大王 聖骨將軍 康虎景 公의 一祖之孫으로서 본관 「信川」을 단본(單本)으로 재통합(再統合)하여 大同團結이 게기(揭記)를 마련하였다.
2010. 6. 1.
信川康氏濟州道宗親會長 39世孫 漢齋 康政統 識
<자료3>
무인도(無人島) 관탈섬(冠脫島)
-관탈섬은 전라도강영감사공(全羅道康永監司公)이 관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장소이다.-
가) 시대적 배경(時代的 背景)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대왕의 현비(賢妃)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고려말 판삼사문하찬성사(判三司門下贊成事)를 역임하였고 조선개국 후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으로 책봉된 강윤성(康允成)의 맏딸이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일곱째 아들 방번(芳蕃)과 여덟째 아들 방석(芳碩)과 경순공주(慶順公主)를 소생(所生)하였다. 오호라 1396년(태조5년 ․ 丙子)에 천명(天命)을 다하였다.
조선 태조는 즉위초(卽位初) 세자책정문제(世子冊定問題)가 있은후, 내심 방번을 책정코자 하였으나 제신(諸臣)들이 추천으르로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을 1398년 (태조 7년 ․ 戊寅) 중춘(仲春)에 세자(世子)로 책정되었다.
이때에 정도전(鄭道傳)은 세자 승위(承位)를 안정케 하려는 목적으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소생들을 지방(地方)으로 보내었다. 세자 책봉과 한씨 소생을 지방으로 분산함에 불만을 품은 다섯째 왕자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은 정도전과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는 일이 전개되었다. 세자 의안대군 방석은 이에 대전(對戰)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398년 (태조7년) 8월에 폐위(廢位)되어 무안대군(撫安大君) 방석과 함께 귀양을 가던 중 서문에서 도륙(屠戮)되어 피살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첫 번째 왕자란이 발생되었다.
태조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정사(政事)에서 손을 떼고 함흥처사가 되기 전 왕위(王位)를 둘째 왕자 영안대군(永安大君) 방과(芳果)에 양위하였다.
1399(개국8년 ․ 己卯)에 존호(尊號) 정종(定宗)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1400년(개국9년)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은 이를 평정하는 등 왕위를 얻기 위해 두 번이나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드디어 정종의 양위를 받은 방원은 1401년 (개국 10년 ․ 辛巳)11월에 태종(太宗)이란 존호로 즉위하였다.
이와 같이 그 당시 나라의 정세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급변하고 혼란스러웠다.
나) 전라강영감사와 관탈섬(全羅道康永監司와 冠脫島)
신덕왕후의 사촌 오빠인 전라康永감사는 본인에게 다가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예견하고 이를 모면하기 위하여 가속(家屬)들을 충청도 보령에 은거(隱居)시키고 1402년(개국11년 ․ 壬午) 맹춘(孟春)에 제주도(濟州島)로 피신하게 되었다. 왜적을 두 번이나 격퇴시켰던 원수(元帥) 전라강영감사는 수로(水路)를 잘 알고 있었기에 범선(帆船)을 타고 「현해탄」을 넘어오던 중 제주도에 근접한 무인도(無人島)에 이르렀을 때, 제주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도안무사겸판목사(都安撫使兼判牧使)」박덕공(朴德公)에게 심적 부담을 덜게 하려고 해상범선(海上帆船)에서 관복을 벗고(冠服脫衣) 평복(平服)으로 갈아입어, 함덕 포구로 입도(入島) 하였다. 이때부터 무인도를 이름하여 「관탈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10. 5. 5. 崇祖의 날
資憲大夫行全羅監司康永公의 18代孫 政統 識
〔참고〕
①流配란?
五刑이 하나로서 유형(流刑)이라 하며 네 번째 중죄인을 말한다. 유형은 죄인을 지방이나 변방 또는 섬 같은 곳에 귀향보내는 형으로 그이 죄가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이 있었다.
②流配人이란?
죄인이 몸이 되어 관직과 품계를 발령대장인 명부에서 삭제함과 동시에 관복을 나라에서 몰수한 후 (削奪官職) 서민복인 평복으로 갈아입히고 또 포박하여 관원들이 감시 아래 유배지로 이송하는 것이 원칙이나 유배지로 가는 도중 살해당하거나 무사히 도착하는 경우가 있다.
유배인은 죄인의 몸이기 때문에 가속과 동행할 수 없으며 관복을 입고 유배지로 이송하는 사례는 더더욱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