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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강파(平康派)

파조(派祖)(履)는 시조(始祖)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의 십팔대 손이고 중시조(中始祖)지연(之淵)은 고려명종조에 문과급제후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이신 신성부원군의 오대종손(五代宗孫)이며 고조부(高祖父)(遠)은 고려 원종조에 금자광록대부 신원부원군이며 증조부(曾祖父) 부전(富傳)은 고려 강종조에 문과 급제후 영록대부 행집현원 전한이었으며 조부(祖父) 득화(得和)는 고려 충열왕조시 문과 급제후 광정대부 전법판서였으며 부친(父親) 생경(生敬)은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증(贈)순충적덕보조공신 자헌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의 큰아들(長子)이며 공(公)께서는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 급제후 조선조(朝鮮朝)인 세종(世宗8년) 충청도 혜미현감(海美縣監)으로 재임 시 1426년 7월 17일 숙부(叔父)인 생민(生敏, 인동현감)과 의주판관 노승덕과 함께 세종께서 인견(引見:윗사람이 아랬사람을 부르는)하여 이르기를 수령의 직임이란 농상(農桑:농사일과 누에치는 일)을 권장하고 부세(賦稅:세금을 매기는 일)와 용역(徭役:賦役국가가노역을 무상으로 징발)을 고르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살 바를 얻게 함에 있음이니 그대들은 힘을 쓰라 하였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義州判官盧承德, 仁同縣監康生敏, 海美縣監康履等辭上引見謂曰,守今之職,勸農桑,均賦役,使民各得其所,爾等勉焉.

이상과 같이 공께서는 해미현감으로 4년간 재임하였으며 큰아들 윤현(允顯:공양왕조 헌림학사) 둘째아들(혜적:黃海兵使) 장손(彦重:병마절제사) 손자(혜적의 아들 ;계손(繼孫:軍資監))이다. 공의 형제로는 면(冕:海州,林川派祖:司直)과 류(旒:遯庵公派祖, 戊長派)와 곤(袞:長湍派祖,安城派祖)과 매제(妹弟:宋仲孫,奉禮:1466년世祖12년에 副知事를 奉禮로 바꾸었다 正四品)가 있다. 공께서는 퇴임후 증(贈)이조판서인데 나이를 추산컨대 90세이상 생존하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막내 동생인 곤(袞)이 태종11년(1411년-성종15년 1484년 졸) 공께서는 고려 공민왕조(1360-1373년)에서 문과 급제한 기록이 있으며 해미현감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세종8년(1426년-1430)으로 정확하게 기록 되어있기 때문이다.(공을 포함하여 곤(袞)이외의 형제들의 생몰연대는 정확치 않다). 그리고 공의 형제들 고려 말에 태어나서 조선조의 세조시 까지 벼슬을 했음은 비슷하다. 이상과 같이 평강파(平康派)는 우리 모든 강씨(康氏)의 대종손(大宗孫) 집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남. 북으로 갈라져 있어 수많은 일가친척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는 아픔이 있지만 이를 잊지 않고 기억 하면서 언젠가는 모두 함께 할 날이 올 것이라 믿고 힘차게 이어나갈 것이다.

작성자 : 돈암공파 37세 동균(대종회 부회장)
평강파 41세 낙진(대종회 이사)


2) 돈암공파(遯庵公派) - 무장파(茂長派)

파조의 휘(諱)는 류(旒)이며 자(字)중보(重甫)(號)돈암(遯庵)이고, 중시조(中始祖)지연(之淵)의 오대손(五代孫)이며 조부는 득화(高麗 忠烈王時 典法判書)이고 부친 생경(生敬 平壤庶尹 版圖判書)의 셋째 아들이다. 공께서 세종(世宗)초에 전과중시(殿科重試)하였고 1447년 세종 27년 사헌부감찰집의(司憲府監察執義)로 계실 때에 상국(相國)김종서(金宗瑞)의 천거(薦擧)로 제포수군첨절제사(薺浦水軍僉節制使)로 부임하여 삼포(三浦)의 왜구(倭寇)를 크게 섬멸(殲滅)한 공(功)으로 승(陞)통정대부(陞通政大夫)하고 증(贈)이조참판(吏曹參判)하였다. (*삼포 : 세종대왕께서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동래의 부산포, 웅천의 내이포, 제포(진해), 울산의 염포, 삼포를 두었는데 이종무(李從茂)장군이 쓰시마(대마도) 점령 후에 대마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다고 해 3곳에 일본인들의 무역을 중개토록 삼포를 두었다. 다만 일본인들은 눌러 살 수 없고 무역이 끝나면 곧 귀국토록 했다 하지만 규정을 어기는 일본인들이 늘어나서 세종말기인 1447년 부산포에 350명, 제포에 1,500명, 염포에 120명이 살기에 이르렀으며 약탈까지 자행했다).

공께서는 1454년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廢位)하고 왕권(王權)을 찬탈(簒奪)하자 기관(棄官:벼슬을 버림) 남하(南下)하여 전라남도 영광군 고성리(現 弘農面)에 둔거(遁居)하였고 호를 돈암(遯庵)이라 했으며 1455년에 세조(世祖)께서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제청(提請)했으나 고사(固辭)하였고 묘소는 홍농방(弘農坊) 이서도향(以西島向:쥐섬방향)이었는데 임진, 정유 양난(兩難)에 실전(失傳)되었으며, 슬하(膝下)에 외아들 윤석(允碩)을 두었고 손자로는 방준, 방걸, 방간, 방언, 방우와 손서(孫壻) 오숙(吳塾) 6남매를 두셨다, 손서의 벼슬은 우후(虞侯:세조 12년에 시행된 절도사의 막료로서 부장. 종삼품)였다.

임진, 정유(壬辰.丁酉) 양난(兩難)에 둘째 방걸과 넷째 방언의 후손(後孫)은 절손(絶孫) 되었으며 큰아들 방준의 둘째 응조(應祚)의 손자인 심원(沈源)의 후손(後孫)들은 위 양난(兩難)시에 심씨(沈氏)가 되어 강원도등 일부 지역에 살면서 강심원을 성씨를 빼고, 심원아라고 부르게 되어 심씨(沈氏)가 되었는데, 1960대 중반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서 저(東均)의 선친(先親) 주하(柱夏)께서 이들을 만나서 교류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친께서 1971년도에 선종(先終;死亡)하신 후에 이들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첫째 방준과 형제들은 갈마곡(고창군 대산면)을 본거지로 하였는데 현재 갈마곡에는 공의 종손(宗孫)들은 대부분 고창군 아산면 용장리와 타지역 등에 살고 있으며 다섯째 방우의 후손들이 갈마곡과 고창군 대산면 신산리 등에 많이 살고 있다. 셋째 방간(叅奉)의 둘째 아들인 응록(應祿)이 이조정랑(吏曹正郎)으로 재직 후에 강진(康津)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손자 의(義)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였으며 갈마곡에 모셔져 있었던 선대들의 묘소도 십여년 전에 모두 강진으로 이장하였다. 다섯째 방우(호:敬齋)의 5대손 지수(智水) 호 인천(仁川) 공이 임진, 정유 양난 후에 세거지(世居地)를 조부인 의사공(義士公:德民)과 조모(善山金氏)를 용장리 선산에 안장하면서 조부는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에 타령(妥靈:영혼을 모심)되었으나 조모는 왜구에 의해 순국하신 부군을 따라 자결(自決)하여 유해(遺骸)를 찾을 수 없어 두 분께서 평소에 사용했던 의복 등을 수습하여 안장한 후 인천공이 영모재(永慕齋)를 수립(竪立;건립)하여 조부 의사공과 부친 귀생(貴生)을 배향했으며 인천공의 큰아들 유태(有泰, 號 花樹亭)는 부친 인천공과 함께 3위(三位)를 배향토록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재공의 둘째 아들 응성(應星, 號 葛川)의 아들 흔(訢, 號 莊峰)과 손자 기종(起宗, 號 湖隱, 장봉의 아들)은 인조(仁祖) 초에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의 의병으로 공을 크게 세워 고창군 공음면 소재 송림산 일대의 토지 약70만여 평을 하사(賀賜)받았으며 이후 숙종(肅宗)때에 기종은 증(贈)호조참의(戶曹參議)로 추증되었다. 인천공의 손자인 유태의 셋째 아들인 후진(侯晉, 號 太平散人)은 숙종(肅宗)때에 감영록(鑑影錄), 역대회령(歷代會靈;족보), 화이잡록(華夷雜錄), 와유록(臥遊錄), 송사지(松沙誌) 등을 저술하였고 국, 내외를 답사했던 중국과 현재의 유라시아 일부 지방의 지도제작 등 다양한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긴 대학자였는데 우리 역사서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문학박사 허흥식(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이 1985년에 공의 학문에 관하여 연구 발표한 후 KBS에서 강후진(康侯晉)의 마한 답사기(馬韓踏査記)에 포함된 감영록(鑑影錄)과 와유록(臥遊錄)의 방영(放影)을 계기로 익산의 백제왕궁인 미륵사지 석탑원형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여 석탑복구 등에 활용하였다. (주;감영록과 와유록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영남대학교부설동빈문고에 원본일부가 비치되어 있으며 화이잡록원본은 2019년 11월 9일에 동균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했다. 지도와 감영록, 와유록은 1960년경까지 원본 일부가 보존 되어 있었는데 이후에 분실되었고 송사지는 고창군문화원에 있으며 역대회령은 분실되었다.) 인천공의 손자 주신(冑信, 候寯의 아들)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였으며 사후(死後) 성균관장(成均館葬)으로 치렀으며, 인천공의 8대손 종규(鍾奎, 父 潤壽)는 고종조(高宗祖)인 한말(韓末) 마지막 과거시(科擧試;黃玹과 동기)인 1887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1888년에 승가선대부(陞嘉善大夫)하였다.

공의 17대손으로는 금식(昑植) 토목기술사. 법식(法植) 호남대학교수.
18대 손 주호(柱鎬) 중부국토건설국장. 원채(原采) 11대 국회의원(國會議員). 병남(炳南) 해전대학교수. 병직(炳直) 부산대학교수와 그의 배(配) 이정아(李靜牙)가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재직하고 있다. 또 민수(珉秀) 철도공사과장. 형윤(炯潤) 사무관. 형원(炯杬) 양궁국가대표선수 등이 있다.
19대 손 광균(光均),배(配) 곡효운(曲曉云) 광운대학 교수. 달환(達煥) 서기관. 택균(澤均) 대한준설공사 상무이사. 정균(丁均) 사무관, 전기안전기술사, 전기2급기술사. 우균(宇均) 사무관. 재성(在成) 사무관. 동돈(東焞) 광주교육청장학관.
20대손 호상(鎬相) 맥시코대학 교수. 현택(鉉垞) 부이사관. 필승(必昇) 육군중령. 현진(鉉鎭), 배(配) 김향숙(金香淑) 부부 세무사 등이 있다. 모두 등재치 못했지만 이외에도 각 부처공무원, 공공기관, 문화, 언론, 예술인, 대기업의 임원, 개인 사업으로 성공한 후손들, 변호사, 세무사, 법무사, 교사, 농어업 등 여러 분야에 활동하고 있다.

작성자 : 돈암공 19대손 동균(대종회 부회장)


3) 장단파(長湍派), 4) 안성파(安城派)

양(兩) 파조 곤(袞) 호(號)공양공(恭讓:시호:諡號:임금이 내린 호)은 중시조 고려문하시중 지연(之淵)의 오대손이며 부는 고려 판도판서 생경(생경)의 넷째 아들로 출생(조선조 태종 11년)하여 큰아들 윤조(大護軍) 둘째아들 윤희(중종조 4등공신) 셋째아들 윤복(上護軍) 큰사위 정인수, 둘째사위 정지치(進士), 셋째사위 이정조(縣監), 넷째사위 정승현(縣監) 7남매를 두었다.

20대에 출중한 무예로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대왕(1425년경)부터 내금위(內禁衛)에 재임하기 시작하여 문종조(文宗朝)와 단종조(端宗朝)에 이어서,
1452년 단종 즉위년(端宗卽位年)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당(唐)나라에 갈 때에 수행(遂行)했다. 이후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55년 상호군(上護軍), 동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1456년 동중추부원사(同中樞院副使)로 신천군(信川郡)에 봉해졌으며,
1458년 동중추원사(同中樞院使) 재임시(在任時) 성절 겸 천추사(聖節兼千秋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1459년(세조11년)에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
1468년(예종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 때 공을 세워 익대공신 삼등(翊戴功臣三等)에 책록(冊錄)되고 전라도절도사(全羅道節度使)가 된 뒤
1471년(성종2년)에좌리공신 삼등(佐理功臣三等)에 책록(冊錄)되었다.
1474년 영안(現:平安)남도 절제사로 부임하여 해산진(海山鎭) 도내(道內) 진보(鎭堡)의 성곽(城郭)을 개축(改築)토록하고 민폐(民弊)를 제거하였다.
148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공께서는 형제 중 유일하게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위의 두 형님들께서는 세종대왕 때에 졸(사망)하였음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바로 위의 형님인 류(旒:遯巖公派祖:戊長派)는 상국(相國:국정 전반을 아우르는)김종서와 함께 단종의 폐위를 반대하는 세력이었는데 제포첨사(현재의 진해)로 부임하여 수행 하던 중에 피신토록 하여 전라도 영광군으로 둔거하였으리라 돈암공파 후손들은 추정하고 있다. 공께서는 부모님과 같은 나이의 위의 세 분 형님들의 사랑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태종11년에 태어 낳았을 때 큰형님 이(履:平康派祖)은 고려조 공민왕 때(1351년-1374년)에 문과 급제 한 후 조선조인 1426년(세종8년)에 해미현감으로 3년간 재임 후에 사망하였을 경우를 유추하면 공과의 차이는 40세 이상의 간격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형인 류(遯巖公派祖,戊長派) 또한 고려조 우왕(禑王:1351-1388) 또는 창왕(昌王)때인(1388-1389)년에 출생하여 조선조 세종(丁未1427년)때인 공의 나이 35-38세에 문과 급제후 세조 즉위년(卽位年)인 1455년에 영광으로 은거 후인 1456-1458년 70-72세에 사망한 것이라고 하면 20-23세의 나이 차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공양공(恭讓公)에 대한 기록은 신천 강 씨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상세하게 기록된 행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선조님들의 출생년도를 추정하고 그 시대의 배경과 역사적인 인식을 새롭게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 주었다고 생각하면 공의 행적으로 새로운 역사공부를 하도록 이끄는 무한한 동기부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공께서는 부모님의 묘를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 북창(北倉)유좌(酉坐)로 모셨다. 공의 묘는 선고(父親 母親)묘하에 임좌(壬坐)이며 부인은 광산이씨 사인의 손녀와 상국 김종서의 손녀인 순천김씨, 옥구반씨 세 분이다. 특히, 장단파는 남과 북으로 헤어져서 살아 온지가 반세기를 넘어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언젠가는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친인척들만이라도 서로 찾아서 함께 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 강 씨들이 조선조 초에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간 이유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조들께서 늦은 나이에 출사를 했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 연대별 행적은 단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을 참조 하여 작성하였고, 나머지는 족보를 살펴서 작성하였음을 밝혀 드립니다.

작성자 : 돈암공파 37세 동균(대종회 부회장)
장단파 36세 덕준
안성파 35세 옥윤(대종회 고문)
안성파 37세 복환(대종회 자문위원)


5) 선산파(善山派)

시조로부터 17世 휘(諱) 득화(得和:이하 휘 생략) 공의 차자(次子) 18世 인동부사(仁同府使) 생민(生敏) 공의 후손들은- 18世 수(壽)- 19世 국승(國升)- 21世 여조 보승랑장(麗朝 保勝郞將) 인석 (仁碩) 공이 선산파조(善山派祖)를 이루어 계대(繼代)하고 있다. 파조의 子 22世 윤리(允釐/함양군사(咸陽郡事) 공은 네 23世 ① 거의(居義/지례현사(知禮縣事), ② 거례(居禮/영덕현사(盈德縣事), ③ 거보(居寶/합천군사(陜川郡事), ④ 거민(居敏/주부(主簿) 네명의 아들을 두셨다.

장자 거의(居義) 공은 24世 신(愼/좌필선(左弼善) 공을 낳으셨다. 공의 세 아들 중 25世 ①응겸(應謙/금성현령(錦城縣令) 공의 후손들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에 세거하고, ②응순(應詢) 공의 후손들과 ③응성(應誠)/의흥현감(義興縣監) 공의 후손들은 구미시 고아읍 망장리에 세거지를 이루어 살고 있다.
차자 거례(居禮/영덕현령) 공은 두 아들과 따님 한 분을 두셨다.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김응기 공이 외손이다. 장자 ① 구(懼/會寧判官) 공의 후손들은 의성군에 조음문중(造音門中), 시동문중(柿洞門中), 가암문중(佳岩門中)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 거례공의 차자는 ② 척(惕/彰信校尉) 공으로 부인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선생의 영애이다. 공은 두 명의 아들을 낳으셨다. 이에 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장자는 백진(伯珍/無名齋) 공으로 학문이 출중하여 갑과에 급제하여 사간을 지내다가 외삼촌 김종직 선생의 문도라는 이유로 무오, 갑자사화에 안타깝게피화를 당하시고, 가족들도 전라도 남원 황죽동으로 유폐되었다. 공의 후손들은 주로 전북 임실과 정읍 전주 장수 금산 등지에 고루 나뉘어 세거하고 있다. 후손들이 선산파이면서 전라도에 세거를 이루어 살게 된 것은 아픈 역사의 상처 때문이다. 차자 중진仲殄/임경당(臨鏡堂) 공은 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를 지냈다. 공의 후손들 중 세상에 문명을 떨친 분이 많으신데, 공의 손자 경선(景善/克齋)ㆍ유선惟善/舟川) 및 유선(惟善)의 아들 복성(復誠/竹磵) 공 등을 들수 있다. 그 후손들은 주로 구미시 평성과 상주, 전주 등지에 세거하고 있으며, 전주대학교 설립자 홍모 박사도 그 직계이다.

윤리(允釐) 공의 3子 거보(居寶/합천군사(陜川郡事) 공의 자손 중 광윤(光胤) 공의 후손들은 주로 경북 예천군 감천면과 유전면에, 희철(希哲/內禁衛禦侮將軍) 공의 후손들은 안동시 남후면 검암, 강원도 횡성과 봉평 일대에 각 세거한다.

윤리(允釐)의 4子 거민(居敏)은 슬하에 자녀가 없으셨으나(무후), 청송 심온(沈溫/領議政)의 아들 심회(沈澮/領議政) 공께서 낙동강 갈대밭에서 표류하는 것을  거두시어 시양자로 삼아 정성으로 부양하셨고, 청송 심씨 문중에서는 공을 주부공파 파조로 모시고, 묘소를 관리하며 매년 제를 올리는 등 공의 공덕을 정성으로 기리고 있다.

작성자 : 진원 종장(전 재경선산파 회장)
병훈(대종회 상임이사)
희동(대종회 이사)
동윤(대종회 이사)


13) 연기파(燕岐派)

연기파의 파조는 휘(諱) 순용(舜龍) 공으로 호는 화곡(化谷).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증조부는 우정승을 지낸 휘(諱) 숙재(淑才) 공이고, 조부는 상호군을 지낸 상산부원군 휘(諱) 서(庶)이고, 부친은 찬성사를 지내신 휘(諱) 윤성(允成:경안백이시며 덕원릉호를 받으셨다) 공이다.

일찍이 원나라에 들어가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 되어 원나라 이름으로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 칭했으며, 고려말 공민왕 3년에 본국에 돌아온 이후 지밀직사사 및 찬성사를 두루 지냈으나, 김의(金義)의 명나라 사신 살해사건에 강제 연루되어 유배등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공의 누이동생은 신덕고황후(信德高皇后)로 태조 이성계의 현비이시다. 양가의 통혼은 전형적인 부원관력(附元官歷)을 배경으로 한 결합으로서, 이성계는 황해도 신천지방의 호족세력이면서 고려말 고려조정에 대거 진출하여 현달한 우리 가문과의 통혼을 통해 이후 조선건국의 역성혁명 과정에서 유력한 협력세력으로 작용하였다. 공은 조선개국 이후 특진보국숭록대부 재령백(特進輔國崇祿大夫 載寧伯)의 작호를 받았으나,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에 일족이 참화를 당하면서 일부 후손들이 충남 연기군으로 피신하여 세거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 세종시 일원에 많이 거주하고 있고 일부는 홍성, 금산, 논산 옥천 등지에 살고 있다.

조선 태조의 어필로 쓰여진 왕지(王旨)를 그 후손 치경(致慶) 공이 영조대왕에게 바치니 태조대왕의 친필 어지를 보고 감탄하여 직접 발문을 쓰고 사액을 내려 어서각을 건립케 하였고, 이후 정조대왕, 고종황제가 사적어필(사적御筆)을 내렸다. 이에 후손들은 충남 연기군 남면(현 세종시)에 어서각을 세워 이를 봉안해왔다. 왕지의 원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왕지 중 가장 오래된 고문서로서 일반인에게는 열람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이자 문중의 보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작성자 : 선호 종장(연기파 총무)


19) 만경파(萬頃波)

만경파조는 문헌공 봉호당 휘 원기(萬頃派祖 文獻公 鳳湖堂 諱 元紀) 공이시다.
신천강씨 중시조 휘 지연공(信川康氏 中始祖 諱 之淵公)의 8세손이며 조고(祖考)는 상산부원군 휘 서(象山府院君 諱 庶)요 고위(考位;아버지)는 찬성사 휘 윤의공(贊成事 諱 允誼 公)이시다. 공은 오형제(元中, 元紀, 元春, 元厚, 元瑞))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으며총명예지(聰明叡智)하시어 유년시절부터 經術(경술)에 通明(통명)하고 학력이 굉후(宏厚)하여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초년에 경원(慶源)과 온성(穩城) 출보시(出補時;벼슬에 나감)에 충효(忠孝)로 교화(敎化)하고 선정(善政)으로 목민牧民)하여 치적(治績)한 바 있었다고 한다 고려말(高麗末) 다난한 때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사명으로 성학(聖學)에 전념하여 포은 정몽주(鄭圃隱) 야은 길제(吉冶隱) 등 당세의 유종(儒宗)과 더불어 논도강학論道講學)하였다. 공은 언제나 염인공검 효제충신廉仁恭儉 孝悌忠信) 8자를 좌우명으로 후학교화(後學敎化)에 열중하셨다.

조선 태조(朝鮮 太祖)께서 예(禮)로 누징(累徵)하고 태조현비 신덕왕후(太祖顯妃 神德王后)의 간절한 청에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어 출사(出仕)했으나 왕자의 난 때 남하하여 두능봉산하(杜陵鳳山下;현 전북 만경)에 전거하셨다. 이곳은 소읍이고 봉화,공마,공려(烽火, 貢馬, 貢礪) 등 세가지 거폐(巨弊)로 인해서 주민은 헐벗고 굶주리며 살기가 극히 어려운 때라서 백성들의 고초가 아주 컸다. 마침 문제(門弟)인 이지로(李芝老)가 전라도백(全羅道伯)으로 부임하여 공을예방(禮訪)하로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백성들의 고초를 얘기하시니 도백(道伯)은 이 삼폐(三弊)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하여 주민의 어려움을 풀어주었고, 도(道)와 역(易)을 강론(講論) 하시어 후학들에게 도리(道理)를 일깨워 주심은 공의 높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공의 후손(後孫)들은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 부락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훌륭한 조상의 숭고한 유덕(遺德)을 이어받고 기리기 위하여 유고집(遺稿集)을 번역하고 추모비(追慕碑)를 건립했다. 公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난계 함부림(蘭溪 咸傅霖) 先生과 같이 전북 만경의 두곡서원에 配享(배향)되었고, 매년 음력 3월에 지역 유림들이 정일하여 향사올리고 있다.

작성자 : 병욱(대종회 이사)


20) 보령파(保寧派)

신천강씨 보령파인 귀존공파(保寧派)와 제주파(濟州派)는 전라감사 등 5도 감사를 지내신 휘 강영(康永) 할아버지의 같은 후손들로 "감사공파(監司公派)"라 칭하여 오다가 근세에 와서 후손들이 보령(충청남도)과 제주도에 크게 번성하니, 장자(長子)이신 조선분순부위행제용감참봉신천강공(朝鮮奮順副尉行濟用監參奉信川康公) 보은(保隱)공 휘 귀존(貴尊) 선조의 후손은 보령파, 감사공이 제주도에 입도하여 부인 탐라 고씨 사이에 출생한 세 아들 휘 정(禎)·복(福)·만(萬) 선조의 후손은 제주파로 두 지역 이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보령파의 시조이신 보은공 휘 귀존은 전라감사 영암 공 강영의 장자이다. 제주도 입도조이신 전라감사 영암 공 강영 할아버님은 호경(虎景) 시조로부터 21세손이며, 조부는 상산부원군 서(庶)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숙공 윤휘(允暉)의 첫 번째 아들로 장손이다. 신덕고(高)황후의 4촌 오빠가 되는 분이기도 하다. 전라감사 영암공 휘 강영은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호군으로 경성(지금의 개성)을 수복하는데 세운 공과, 기해 격주 공으로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으로 서훈 되어 강계만호의 직위를 받았다. 우왕 3년(1377년)에는 홍산(지금의 논산)지역에 외적이 침범함에 조전원수로서 최영 장군 등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시고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홍산대첩(鴻山大捷)의 영웅으로서 많은 공적이 있어 공신록 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시고 한림원 학사를 지냈으며, 자헌대부의 직위에 올랐고 전라감사를 역임하시면서 절의와 문장이 일세를 떨치셨다.

李太祖에 의해 조선(朝鮮)이 건국된 후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내시던 중, 왕자(王子)의 난(亂)으로 특히 관직에 있던 강씨문중(康氏門中)이 정치적 박해를 당함에, 경성에 큰아들 귀존과 부인의 소식을 모른 채 태종 2년(1402년)에 제주로 들어가서 신천강씨의 입도 시조가 되었다. 감사공의 장자이신 휘 귀존(貴尊)공 께서는 보령파 시조인데 당시 공의 종질(從姪)이신 장민공(莊愍公) 휘 순(純) : 계권공의 손자 : 남포파)공과 함께 보령으로 일시 피신하여 들어가셨다가 정착하셨으니 그 후손들이 보령파이다. 그 후 장민공 휘 순(純)은 영의정이 되셨고 또 순 공이 사화에 의하여 억울하게 졸(卒)하시고 집안이 모두 흩어지게 되어 보령을 떠났다가, 다시 보령의 산수동에 후손들이 돌아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귀존' 공의 후손들이 정착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 같으며 이웃이 된 두 집안은 각별하게 친하게 지냈다고 전해온다.

보령파의 시조이신 조선분순부위행제용감참봉 신천 강공 귀존의 묘비에 기재된 내용을 참고하면 귀존공의 아버지는 문과 한림학자이며 자헌대부행 전라관찰사(文科翰林資憲大夫行 全羅觀察使)를 지내신 이름 영(永)이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보첩이 없어 알 수 없으며 부인은 안인(安人)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직장(直長) 준보(俊輔)의 딸이시니 쌍묘로 묻히셨다. 슬하에 아들은 윤필(倫弼)이니 벼슬은 병절교위(秉節校尉)요 손자는 윤희(潤禧) 인바 증·현손은 기록하지 않았다. 귀존 공은 슬프게도 세상의 사화로 인하여 아버지 행방을 알지 못하고 호서지역으로 옮겨 왔고, 아버지인 감사공은 제주에 은둔하시니 부자가 서로 소식을 모르고 이별한 채로 살다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형제가 왕래하지 못하였으므로 생전에 한을 안고 돌아가셨다. 보령파인 귀존공의 후손들은 대전 충청남도 공주, 보령, 논산, 금산, 부여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묘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 후손들이 보령시 신흑동 산 103번지에 있는 귀존 공의 묘역에서 봉행하며 유덕을 기리고 있다.

작성자 : 현상(보령파 남당문중 총무)
대성(대종회 이사 겸 제주종친회 수석부회장)


21) 제주파(濟州派)

신천강씨 제주파는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이신 전라감사공(全羅監司公) 휘 강영(康永) 할아버님의 후예들이 제주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면서 일컬어지는 파명 이다. 지금은 감사공의 후손이 많이 번창하여 감사공 휘 강영이 제주에서 낳은 아들 3형제의 호를 따라 경재공파(휘 정 후손), 농헌공파(휘 복 후손), 연당공파(휘 만 후손)으로 나뉘어 부르고 있으며 경재공파는 서귀포시 동지역과남원읍 표선면, 성산읍, 구좌읍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농헌공파는 표선면, 성산읍, 서귀포시 동 지역 등에 거주하고 있고, 연당공파는 제주시와 조천읍, 구좌읍, 애월읍, 한림읍 등에 거주하고 있으며, 전국으로 퍼져 대략 3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 입도조 이신 강영 할아버님은 호경(虎景) 시조로부터 21세손이며, 조부 서(庶)의 다섯 번째 아들인 윤휘(允暉)의 첫 번째 아들로 장손이다. 신덕 고(高) 황후의 4촌 오빠가 되는 분이기도 하다.

공의 호는 영암(瀛巖)이며, 제주 종친들은 영암 감사공으로 칭한다.(앞으로 이 글에서는 감사 공으로 칭함) 감사공께서는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호군으로 경성(지금의 개성)을 수복하는데 세운 공과, 기해 격주 공으로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으로 서훈 되어 강계만호의 직위를 받았다. 우왕 3년(1377년)에는 홍산(지금의 논산)지역에 외적이 침범함에 조전원수로서 최영 장군 등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시고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홍산대첩(鴻山大捷)의 영웅으로서 많은 공적이 있어 공신록 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시고 한림원 학사를 지냈으며, 자헌대부의 직위에 올랐고 전라감사를 역임하시면서 절의와 문장이 일세를 떨치셨다.

李太祖에 의해 조선(朝鮮)이 건국된 후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내시던 중, 왕자(王子)의 란(亂)으로 특히 관직에 있던 강씨문중(康氏門中)이 정치적 박해를 당함에, 경성에 큰아들 귀존과 부인의 소식을 모른 채 태종 2년(1402년)에 제주로 들어와서 신천강씨의 입도 시조가 되었고 제주 고씨를 배필로 하여 아들 3형제를 두셨다. 제주에 낙향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후진교육에 힘 기울인 결과, 고려의 유신으로 충절의 귀감이 된 김만희(김해김씨의 제주입도 시조), 이미(경주이씨의 제주입도 시조), 한천(청주한씨의 제주입도 시조) 등과 더불어 제주 4현(濟州四賢)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감사공에 대해서는 제주에서 여러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사실에 대하여 고찰해보기로 한다.
감사공께서 전라감사를 지내시다가 그 시기인 1396년 신덕 고 황후께서 승하하시자 이방원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인 방석과 동생 방번 등을 제거하였고, 1402년에는 신귀, 조사의, 강현 등이 왕자의 난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등 정세가 어렵게 돌아갔다. 이때 감사공 께서는 전라감사의 직을 버리고 제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감사공은 제주로 오는 뱃길의 중간쯤에 있는 무인도를 바라보며 이제는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로 관복을 벗었다고 해서 지금도 제주 사람 들은 그 섬 이름을 "관탈섬"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감사공이 제주에 들어올 때 함덕의 포구로 들어왔는데, 그 포구는 강영이 들어온 포구라고 해서 지금도 "강영개"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지금도 감사공에 관한 일화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감사 강영 할아버님의 제주에서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감사공의 묘소는 조천읍 조천리 119번지에 위치해 있다. 감사공의 묘소는 황금 닭(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 마을의 지명도 鳳巢洞(봉황이 둥우리)이라고 한다. 감사공의 묘소는 후손에 전해지지 않아 찾지를 못하다가 후손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한 끝에 묘를 찾았는데 기이한 것은 그 묘에서 감사공의 분묘라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는 지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443년(세종 25년) 부터 2년 동안 제주목사로 재직한 기건(奇虔, 호는 靑坡) 목사는 감사공의 분묘에 지석을 새겨서 몰래 묻어두었는데, 후손들이 1937년 3월 3일에 그 지석을 찾아낸 것이다. 그 지석에는 신천강영감사 임인은적어사 유정복만삼자 유충의 청파지(信川康永監司 壬寅隱跡於斯 有禎福萬三子 有忠義靑坡志)라는 24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석을 보고 감사공의 분묘임을 확인한 후손들은 무한한 경외감과 벅찬 환희에 모든 후손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묘를 다듬는 사업을 진행하였고, 2만 2천평의 넓은 묘역에 크고 장엄한 분묘를 만들어서 인근 학교 학생들이 소풍 오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석을 발견한 매년 3월 3일을 춘계대제일로 정하여 시제를 모시어 오다가 지금은 5월 5일에 제주도 후손 1천 여명이 모여 시제를 봉향하고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감사공의 춘계 대제일 에는 먼저 조천 서원에서 제향을 드리고 이어서 신천강씨 합동위령비 제단에서의 제향을 드리며, 다음에 감사공 묘의 제향, 다음에 감사공의 아드님들인 정 복 만 3위 제단에 제향을 드린다.

작성자 : 대성(대종회 이사 겸 제주종친회 부회장)


22) 영변·운산·개천파(寧邊·雲山·价川派)

파조의 휘(諱)는 석(錫) 공으로 자는 희명(熙明), 호는 의암(義巖)이다.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조선 초 임금을 호종한 공로(國初有扈從)로 성원공신(聖元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증직(贈職)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副使) 겸 행의주부윤판도판서(行義州府尹版圖判書)를 역임했다는 사실이 공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공의 조부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상산백(象山伯) 휘(諱) 서(庶) 공이며, 부는 공민왕조에 판도판서(版圖判書) 황해감사(黃海監司)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역임하신 휘(諱) 윤휘(允暉) 공이다. 백형은 제주도 입조도이신 전라감사(全羅監司) 휘(諱) 영(永) 공이시며, 신덕왕후와 사촌남매간이시다. 공은 인물이 출중하여 문무를 겸비하셨고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의주부윤 재직시에는 압록강 국경방어를 철통같이 하여 이민족의 침범을 막았으며 명나라와 교역하여 국가재정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묘향산 속으로 은신하여 자손 교육에만 전념하셨다.

공의 증손이 세 명이다. 휘(諱) 자인(自仁) 공은 통대대부 어모장군(通政大夫禦侮將軍)이 되었다. 공은 영변에 입향하여 그곳에서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공의 묘소가 천하명당인데 일화가 있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공이 돌아가실 때 상가에 김모라는 지관이 와서 공의 묘자리를 잡아놓고 하는 말이 “이 묘지는 천하의 명당이지만 삼대독자가 장애인으로 대를 이을 것이다. 그러나 후손은 번성하여 수 천호로 늘어날 것이다”하니 상주가 고심하다가 이곳에 묘를 쓰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관시에 백회를 넣어 절대 이장할 수 없도록 했다. 그 후 지관의 말대로 삼대독자 휘(諱) 희담(熙淡) 공이 장애인으로 출생하였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산소 탓이라 하여 인부를 동원하여 묘를 이장하려 하였으나 백회덩이가 너무 견고하여 이장을 포기하고 이제 대가 끊겨 집안이 망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산은 부유하고 인물은 준수하였으나 장애인에게 누가 딸을 줄 것인가 걱정했는데, 한 마을에 배씨 성을 가진 처녀가 자청하여 시집왔다. 그후 배씨 할머니가 삼형제를 낳았는데 그 손자 16명이나 태어나고 증손이 번창하여 해방직후에 영변에 거주하는 후손이 2500호가 넘었다고 한다. 광복 후 남한으로 넘어온 후손이 300여호나 되며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저명인사가 많다고 한다.

휘(諱) 석(錫) 공의 둘째 증손이 휘(諱) 자보(自保) 공이다. 공은 성균관 진사를 지내고 그 후손들이 개천(价川)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어 개천파라 칭한다.
휘(諱) 석(錫) 공의 셋 째 증손이 휘(諱)가 자의(自義)인데 운산으로 처음 입향하여 거하게 되어 그 후손들을 운산파라 칭한다. 아쉽게도 개천파, 운산파 종원들은 이북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에 남한에는 손들이 많지 않다.

작성자 : 창용(대종회 부회장)


23) 평택파(平澤派)

평택은 조선시대는 경기도 진위현, 일제시대는 진위군으로 불러지다가 현재는 평택시로 합병되었다. 이 역사적 변천에 따라 종회에서 진위파에서 평택파로 변경하여 부르게 되었다.
평택파조의 휘(諱:이하 휘 생략)는 우(祐) 공으로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문무를 겸비하셨으며 고려말에 상장군, 찬성사(정2품)를 역임하셨다, 조선 초에는 의정부 찬성(종1품), 태조대왕 때 원종 1등 공신, 태종 때 호성 1등 공신을 지내시고, 세종 15년 1433년 5월 17일 졸하셨다.

공이 돌아가시자 세종대왕께서 친히 3일간 매우 슬퍼하시며 육식을 멀리하시고, 공은 왕실의 지친(대고모부)이며 국가에 공신으로 시호를 친히 ‘양정’(良靖)’이라 내리셨다. 그 뜻은 온양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양良), 너그럽고 아름답게 몸을 마쳤다(靖)는 말이다. 공의 조부는 상산(황해도 곡산 옛 지명)부원군 휘 서(庶) 공이며, 부는 윤희(允暉) 공이시다. 공은 자헌대부 황해도감사, (증)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셨다. 공의 형제는 네 명으로 백형은 제주파조이신 전라감사를 역임하신 영(永) 공이고, 중형은 영변파조이신 석(錫) 공이시며, 신덕고황후와는 사촌 남매지간이시다. 공의 배위은 완산(전주)이씨 ‘완산 대부인 정경부인’이시며, 조선 태조대왕 이성계의 백부이신 ‘완창대군 이자흥’의 따님이시다. 즉 태조 이성계의 사촌 누이가 되신다. 정경부인 할머니의 친정 고조부는 태조대왕 이성계의 4대조이신 ‘목조대왕’이며, 증조부는 ‘익조대왕’, 조부는 ‘도조대왕’, 부는 ‘완창대군(이자흥)’, 오라버니는 ‘영성대군(이천계)’라고 기록되어있다.

평택파 종원들은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수월암리(도도리),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음양리 (화성문중)에 세거한다. 평택의 종산은 국가에서 산업공단으로 수용했다. 종회에서 의견을 모아 충남 당진시 당진읍 사기소리 산62로 천장(면례)하고, 시제는 음력 10월 15일 충남 당진 종산에서 봉행하고 있다.

작성자 : 학섭(대종회 이사)


26) 발산파(鉢山派)

발산파의 파조는 시조(始祖) 호경(虎景) 공으로부터 19世인 탁(度) 공이시다. 공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순성보절(純誠輔節) 사공상주국(司空上柱國)으로 충원백(忠原伯)이었다. 공의 아들은 한 분인데 그 어른이 20世 윤화(允和) 공이다. 윤화(允和) 공은 자헌대부 호조판서(資憲大夫 戶曹判書)를 역임하셨다. 공은 21世 희(熙)를 두셨는데 희(熙) 공은 자헌대부행한성부판윤(資憲大夫行漢城判尹)을 역임하셨다. 22世 순생(舜生)은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23世 려(礪) 공이 발산리 입향조인 24世 진경(晉卿) 공을 낳으셨다. 입향조(入鄕祖) 진경(晉卿) 공은 병절교위충무위부사정(秉節校尉忠武衛副司正)을 역임하셨다. 공이 입향하게 된 계기는 450여 년 전에 남이(南怡)의 무고(誣告)로 영의정 순(純) 공께서 무고(誣告)되어 참형되자 그 화(禍)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처음 계룡산(鷄龍山)으로 피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도(道)를 닦으시다 지금의 세종시 금남면 발산리로 들어오셨다. 입향 배경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진경(晋卿) 공의 부인인 평양 조씨 가문과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평양 조씨 가문이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있기에 처향으로 오지 않았나 싶다. 공이 지금의 세종시 금남면 발산으로 들어오시어 후손(後孫)들을 양성(養成)하여 현재의 집성촌(集成村)을 이루는 초석을 다져 집성촌을 이루고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의 선대 5代 조상들의 묘소는 알 수 없어 현재는 위패(位牌)만 모시고 시제(時祭)를 지내고 있다. 아마 화를 피하여 이전에 살던 세거지에서 급하게 피신하였기에 묘소를 이장하지 못하고 여러 사유로 돌보지 못하다가 실묘하지 않았나 싶다. 24世 진경공(晉卿公)의 시제(時祭)는 매년 음력 10月6日 세종시 금남면 용포리134번지 강당제실(講堂祭室)에서 발산파 종현들이 모여 時祭를 지낸다. 옛날에는 시제(時祭) 지내는 날이면 용포리에 사는 타성(他姓)들의 아이들까지 와서 봉송(封送)을 타 가려고 모두 모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진경공(晉卿公)은 아들 25世 호(瑚)를 낳으셨는데 벼슬이 승사랑내의원습독관(承仕郞內醫院習讀官)에 이르셨고, 세 명의 아들을 두셨다. 장자 26世 세운(世雲) 공은 계공랑충순위행예빈사직장(啓功郞忠順衛行禮賓寺直長)을 역임하셨다. 차자(次子) 세문(世雯) 공은 무후(無後)하셨으며, 3자(三子) 세무(世) 공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하셨다. 세운(世雲) 공은 長子 27세 이(儞)와 차자(次子) 엄(儼)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장자 이(儞) 공의 호(號) 용계(龍溪)다. 공은 1579년 생진(生進)에 구중(俱中)하여 제(弟)로 더불어 연벽(聯璧)하고 1585년에 또 문과(文科)에 탁(擢:뽑다)하여 승문(承文) 정자(正字)를 되었다. 관직으로는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을 역임하고 사계 김장생의 문제(門弟)이다. 둘째 엄(儼) 공은 자(字)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인계(寅溪)로 1545년 (인종 1) 출생하여 1579년 선조(宣祖) 12년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에 연벽(聯璧[兄弟同榜:형제와 같이 급제함])했다. 관직으로는 충순위(忠順衛) 역임했다. 장자 이(儞) 공은 28世 시민(時敏/통덕랑(通德郞) 공과 시백(時伯/통덕랑(通德郞) 공 등 두 형제 분의 자손(子孫)들이 용계공파(龍溪公派)라고 불리며 세종시 금남면과 대전 용계동, 서울 각지(各地)에 분포(分布)되어 살고 있다.(大宗會理事 발산파 40世 康周鉉)

차자 엄 (次子 儼) 공은 28世 시진(時進)-시건(時建)-시만(時萬)-시적(時迪) 4형제분을 두시고 장자(長子) 시진(時進) 공의 字는 퇴부(退夫) 號는 산제(山齊)이며 學正(고려시대 국자감,성균관에 속한 정9품) 벼슬에 급제하셨다. 공의 증손(曾孫) 31世 협(協)은 자(字)는 자경(子慶)이며 1674년(현종 15년)에 태어나셨으며 공이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厚墩)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소(墓所)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아버지의 명복(冥福)을 빌며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등 효행(孝行)이 지극하셨다. 공께서는 일가 친척(親戚) 아이들을 모아놓고충효(忠孝)를 가르쳤으며 1750년 3월에 향년(享年) 77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公의 충효정신(忠孝精神)을 기리기 위하여 세종시 금남면 발산리73-2번지에 강협정려문(康協旌閭門)을 세우고 향토유적(鄕土遺蹟) 제 15호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되어 보전(保全)되고 있다. 公의 후손(後孫)들이 지금의 효자공파(孝子公派) 자손(子孫)들이다. 최근(最近)엔 발산파 40世 준현(準鉉)종장이 국회의원(國會議員)에 당선(當選)되어 가문(家門)에 영광(榮光)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 외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輩出) 하였고, 현재(現在) 세종시(世宗市) 금남면(錦南面)에는 발산리와 용포리에 약100여 가구가 세거(世居)하며 집성(集姓)을 이루고 살고 있다.(대종회 부회장 39世 泰男. 41世 永泰/이사 40世 泰鉉. 榮鉉/ 고문 38世 孝燮. 40世 大鉉/자문위원 40世 義鉉. 39世 基寬)

26世 세무(世) 공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내시고 공의 후손들이 판관공파(判官公)로 분파된다. 公의 子 27世 위(偉) 공은 호종공신승문원정자(扈從功臣承文院正字) 관직을 역임하셨다. 公의 子 28世 시중(時重) 公은 편정대부한성부행서윤(編政大夫漢城府行子庶尹)을 역임하셨다. 公의 묘소가 행정신도시개발로 매각하게되어 임야를 구입해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결의했다. 이에 36世孫 현수(鉉洙, 당시 부여군 산림조합장)가 주도하여 1998년 9월 임야를 부여군 홍산면 장천리 산 491-1번지에 약 1만 5천 평을 매입하여 산재되어 있는 선조들의 묘소를 전부 이장(移葬)하여 아주 훌륭하게 제실(祭室)도 건립(建立)하여 매년 음력 10월 15일 시제를 모시고 있다. 판관공파(判官公派) 후손(後孫)들은 부여(扶餘)와 서울, 경기, 대전, 논산 등지에 분포(分布)하여 살고 있다. (대종회 고문 36世 鉉洙/理事 37世 來官)

작성자 : 36世 鉉洙(대종회 고문)
40世 泰鉉(대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