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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중시조 휘 지연(之淵) 공은 고려 명종 때 분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문화시중은 조선조의 영의정에 해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 이시다. 고려 몽고난 때 고종이 천도함에 시중(侍中)으로 호종(扈從)하는데 공로가 많았음으로 충렬왕조에 와서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시조 휘 호경(虎景) 공 이하 13세(世)까지 대략 기사(記事)가 있으나 자세한 사적과 연월을 상고하기 어렵고 중시조인 14세 휘 지연(之淵) 공에 이르러 서야 연대와 사적이 확실하다. 전국의 康씨가 전부 공의 후손 이므로 우리 康씨의 중시조로 모시게 되었고, 후손들이 신성부원군의 신성 즉 신천(信川)를 따서 본관으로 정하였다. 신천군지(信川郡誌)를 보면 강씨는 원래 차토인(此土人)이라 대대로 신수의 북쪽에 살았으며 대성(大姓)으로, 고려조에 벼슬에 많이 올라 백성들로 부터 추앙받는 망족(望族)이었다.

휘 지연 공이 돌아가시자 승산(升山-신천의 옛 지명)에 장(藏)하고 자복사(慈福寺)를 세워 원당(願堂)을 삼았다. 그 후 홍건적의 난에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 졌으나, 조선 초에 읍 터를 자복사터에 정하는 바람에, 광복사의 땅 일부를 바꿔 분묘를 천장(遷葬)하고 화산관(花山館) 뒤에 부군당(府君堂)을 세우고 관에서 제향을 올렸는데 제수로 백미, 닭 ,조기, 쇠고기, 술등을 관급(官給) 할 정도로 당당 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우리 康씨는 본시부터 신천 일대를 중심으로 살아온 것이다.
(공의 분묘가 현재 황해도 신천군 북부면 산죽리 광복동에 있으며, 그 묘소가 원래 있던 곳은 신천군청 객관 후편 쪽에 있던 것을 조선 초에 객관을 옮기면서 객사를 공의 묘소에 다 세우게 되는 우를 범하고 후에 잘못을 알고 광복동으로 이장하였다.)

묘소 이장에 대한 기이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공(公)의 분묘가 본시 신천읍 객관 뒤편에 있었는데 조선 초에 읍터를 그 곳으로 정하고 객사를 옮겨 공의 묘소에다 세웠다고 한다. 그 후로 신천읍에 새로 부임한 군수가 하룻밤을 지내면 문득 죽고 마는 것이다. 수차례에 걸쳐 이 모양을 당하니 사람마다 신천군수로 내려감을 꺼려하던 중 지모가 출중한 사람이 있어 이 고을 군수로 내려왔다. 그분이 도임한 첫 날에 밤에 4,5경에 이르자 장대한 노인이 관대를 갖추고 들어와서, "나는 전 고려문하시중 강모(康某)요. 나의 해골이 지금 이 객사 아래 있어 불편하므로 내 분묘를 이장해 달라고 말하려 했으나, 사성(군수)들이 혼절하고 말아 원을 풀 수가 없었소. 이제야 장자(長子)를 만나서 내 원을 풀게 되었구려."하며 현 객사 몇 째 기둥 아래 해골이 묻혀있으니 곧 옮겨 줄 것을 당부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아침에 사람들을 시켜 그 기둥 밑을 헤쳐 보니 과연 고장(古葬)이 있어서 바로 광복동으로 이장하였다.

이장하는데도 또한 기이한 말들이 전해진다.
어느 곳을 택하여 이장해야 할 것인지 염려하던 중에, 공이 군수의 꿈에 나타나 "내 분묘를 이장할 자리는 축문을 공중에 띄워 그 축지가 날아가 앉는 곳에 해 달라."고 하므로 그대로 하여 지금의 분묘자리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 같은 전설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으나 지금 광복동에 있는 묘소는 세인이 명당이라 칭하는 곳이며 그 묘소는 근 천년을 내려오도록 보전되어 있다. 또한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전국에 수십만에 달한다.

족보를 살펴보면 조선 초에 읍 터를 자복사터에 정할 때 우령산 남쪽 광복사 동학을 갈라서 자복사터와 바꾸어 이장 하였다 하였으며 묘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묘비 전면에는 시중공강지연묘(侍中公康之淵墓) 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후세손 통훈대부행풍천도호부사(後世孫通訓大夫行豊川道護府使) 강 의(康 顗)와 통훈대부문화현령(通訓大夫文化縣令) 정언룡(강씨 외손) 등이 입석운운 하였으며, 생원 강경선(康景善; 顗의子)이 서(書)한 바, 강경선은 곧 풍천지자라 하였고 화산관의 뒤편에 있던 부군당은 갑오동학란(갑오개혁, 1894년)후로 폐지되었다. (의 : ~1541년졸, 경선 : 1514생 ~ 1565졸 - 유선의 형, 선산파)

숙종 무오년(1678년)에 후손 우량(友諒)이 상소를 올려 공의 묘소에 나라에서 치제(致祭)령을 내리고 묘소를 개수하였다. 정조 정유년(1777년)에 후손 몽설이 관에 고하여 묘 옆에 타인들이 암장 한 것을 이장케 하였고, 그 후에 후손 균(均)과 혁조(赫祖)가 황해도와 평안도 종문에 알려 위토(位土)를 마련하고 매년 세향을 봉행케 하였다. 순조 6년 병인년(1806년)에 균의 아우인 후가 신도비를 건립 하였는데 비문은 송우암 선생의 후손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선생이 찬(撰)하였다.

그후 국운이 불행하여 남북이 분단되니 남쪽에 있는 후손들은 60여년 동안 묘소에 세향은 고사하고 성묘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차 1975년 9월 과천시 문원리 산148번지에 공의 신단을 세우고 주변을 성역화 하였고, 매년 10월 3일에 세향을 봉행케 되니 전국에서 각파 후손 천여명이 운집, 숭조목족(崇祖睦族)의 연례행사로 정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