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천강씨(信川康氏)의 본관은 신천(信川)외에 별관으로 곡산(谷山), 재령(載寧), 안릉(安陵), 강령(康翎)등이 있음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본관의 생성 과정을 보면, 한 문중의 선조들이 오랜 기간동안 특정지역에 세거(世居)하면서 임금으로 부터 그지방의 지명(地名)으로 봉작(封爵)을 받는 경우도 있고, 선조중 높은 벼슬을 받은경우, 그 후손들은 자긍심으로 벼슬 받은선조의세거지명(世居地名;살아온 지방이름)으로본관을 삼아 왔다.
우리 신천강씨는 신라 말 부터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유력한 토호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고려건국과 조선건국에 중요한 역활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중시조 이신 휘지연공이신성부원군으로 봉작 받으심에 우리 후손들은 모두신천(신성)을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곡산'의 경우는신덕왕후께서 오랜 기간동안의 정치적 박해에서 벗어나 현종10년에 왕후의 자리에 복위되시어, 종묘에 부묘 되시고 왕후의 부친(경안백휘윤성)과 조부 (휘서)께서는 '상산부원군'에 추증 되시니, 후손들중에 일부가 왕후께서 탄강하신 ‘곡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은 "선조님의 본관이 ㅇㅇ이기 때문에ㅇㅇ부원군에 봉해졌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지가 않고 봉작이란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나 또는 왕족들에게 그가 사는 고장에서 영화를 누리고 살수 있도록 배려하여사는곳의 명칭을 붙여서 ‘ㅇㅇ부원군’등에 봉작하거나, 사후에는 명예로 추증되는 것이며, 먼 훗날에 그 후손들은 작위를 받으신 선조님이 자랑스러워 그어른의세거지를따라본관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재령'(안릉)은안릉부원군(휘득룡)으로추증 되신 선조님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후기 부터 일부 후손들이 재령(안릉)을 본관으로 쓰기시작 하였고,
‘강령’은 선조님(휘 拯)이강령현(康翎縣)에서 큰벼슬 (중서시랑평장사 中書侍郎平章事)을 하시며오래도록세거하셨으니 그 후손들이강령을 본관으로 삼께 되었다.
현세에도 정치인들은 각 지방에 자기 출신지를 근거지로 삼아 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기가 성장한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신천, 곡산, 재령(안릉), 강령은모두황해도에 있는 지역으로(지도참고)서, 우리 조상님들의 대부분이신천등황해도에 근거를 두고 있었음을 확연히 알수 있다.
위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같은 황해도지방인 신천 곡산 재령 강령을 구태어 구분하여 본관을 정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아마도 당시에는 교통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지금이라면 아마도 분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본관인 신천, 곡산,재령, 강령이 지역적으로 보아도 다를 바가 없고, 더구나시조님이나중시조님을 생각하면 같은 뿌리인 우리가 - 본관을 달리 쓴다고 하여 아무것도 다른것이 없다는 것이다,
본래 본관을 정하여 사용한 뜻이어느 지방 사람인지를 구분하기 위하여살아온 지방의 이름을 본관으로 하였던 것인데(지금의 본적과 같은 개념), 우리康씨의 본관과 별관은 같은 황해도 지방내의가까운 곳인데 구태어 구분해야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할 것이다,
기왕에 이렇게 별관으로 구분 된것을 어찌하랴 만은, 이러한 사정을 안다면 같은 조상의 같은 후손들이 본관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내세워, 문중일에 걸림돌이 되고명칭에 연연하는 모습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문중을 위한 바른일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 선조님중 어느 할아버지 손(孫)인지를 구분해 보려는 목적이라면, 57개 분파도에 더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직계선조님이 구분 되어있고, 지파별로 종친회도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더욱이별관만으로는 직계조상님의 구별도 되지 않으니더말할나위도 없다 하겠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조상님들은 신천지방을 토대로 하여 성장하고 세력을 키워왔으며 '신천'이 그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본관은신천으로통일하여 쓰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에당위성이 있고도 남음이 있다 할것이다. -아 현-